성공칼리지 성공 BOOK 소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김두현 2007-02-12 15:04:54 1441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흑백분리제도에 순응하지 않고 당당히 맞선 부모님 밑에서 킹 목사는 어릴 때부터 흑인들에 대한 차별대우와 경제적 불평등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고민했다. 처음에는 성직자보다 모태신앙이었던 기독교에 바탕한 사회개혁을 꿈꾸며, 예수의 사랑의 가르침에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접합시켰다. 비폭력주의란 단순한 평화주의가 아니라 저항은 하되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백인 기득권층과 정부의 공권력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에 있던 흑인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킹 목사는 이런 비폭력주의에 입각한 민권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억압받고 멸시 당하며 가난에 찌든 형제자매들의 지위향상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랑의 호소로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던 탁월한 웅변가, 자신의 영달이나 안락을 구하지 않고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운동을 지휘했던 진정한 투사, 모두가 주저할 때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홀로 베트남전에 반대하며 말년에 새로 빈민운동을 계획했던 마틴 루터 킹. 그러나 그는 1968년 괴한의 총탄을 맞고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 차례
1. 어린 시절
2. 모어하우스대학
3. 크로저 신학교
4. 보스턴대학
5. 내 아내 코레타
6. 덱스터 애브뉴 침례교회
7. 몽고메리 운동
8. 필사적인 저항
9. 몽고메리의 승리
10. 확산되는 투쟁
11. 새로운 국가의 탄생
12. 죽음의 위협
13. 비폭력 운동의 산실, 인도 순례
14. 연좌운동
15. 애틀랜타에서의 체포와 대통령 선거
16. 올버니 운동
17. 버밍햄 운동
18. 버밍햄 교도소에서 온 편지
19. 드디어 자유다!
20. 워싱턴 행진
21. 환상의 죽음
22. 세인트 오거스틴
23. 미시시피의 도전
24. 노벨 평화상
25. 말콤 엑스
26. 셀머 투쟁
27. 와츠
28. 시카고 운동
29. 블랙 파워
30. 베트남 전쟁
31. 빈민운동
32. 못 다 이룬 꿈
 
1. 어린 시절
  나는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인 1920년대 말, 애틀란타 시 5번가에서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중산층에 속했다. 온화한 어머니와 엄격한 아버지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질 수 있었다. 흑백분리제도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부모님은 그것이 자연적인 질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상황일 뿐이니 이런 제도에 순응해서도 안 되고, 열등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내게 "너는 누구 못지 않게 뛰어난 아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5살 때였는데, 교회는 제2의 집이나 다를 바 없었다. 소년기가 끝날 무렵 나는 정신적 성장의 계기를 맞게 됐다. 한 가지 사건은 외할머니의 죽음이었다. 나는 외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영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됐다. 내게 충격을 준 또 한 가지 사건은 여섯 살 때부터 친하게 지낸 백인 친구와의 문제였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놀던 친구가 어느 날 "우리 아버지가 이제부터는 너랑 같이 놀지 말래."하며 멀어진 것이다. 
  이 일을 통해 나는 난생 처음 인종문제를 확인하게 됐다. 어린 시절의 치욕스런 기억들은 흑백분리제도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게 했다. 또한 주위에 가난한 흑인들을 통해 인종차별 뒤에는 경제적 차별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난한 백인들 역시 경제적인 차별을 당하며 착취당한다는 걸 알고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불평등을 깊이 인식하게 됐다.
 
2. 모어하우스대학
  나는 열 다섯 살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졸업한 모어하우스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할 수 있었는데, 특히 데이빗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소로우의 책을 통해 비폭력 저항을 처음 접했는데, 선에 협조하는 것뿐 아니라 사악한 제도에 협조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 의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대학에 들어간 직후 인종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대학간 협의회'에 참여했다. 인류에 대해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성직자가 될 것인지 많이 갈등했다. 성서연구 강좌를 들으며 차차 갈등이 해소되고, 모어하우스 대학장인 메이즈 박사와 조지 켈시 교수, 무엇보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으로 성직자의 길을 결심했다.
 
3. 크로저 신학교
  성직자의 길을 결정하고, 1948년 스무살의 나이로 펜실바니아 주 체스터에 있는 크로저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사회악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위대한 사회철학자들의 저서를 섭렵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홉스, 벤덤, 밀, 로크 등을 탐독했다. 1949년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을 읽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매혹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였다. 여러 면에서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첫째는 신의 개념이 자리잡을 수 없는 유물론적 역사관 때문이었다.
  신학교 시절, A. J. 무스트 박사의 강연을 통해 간디 사상을 처음 알았다. 그 후 하워드 대학 총장 모디카이 존슨 박사의 강연을 듣고, 그 심오한 사상에 충격을 받고 당장 서점에 가서 간디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책을 사 읽었다. 그를 통해 사회개혁 분야에서의 '사랑의 힘'에 새롭게 눈떴다. 사랑은 사회와 집단을 변모시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라는 확신도 갖게 됐다. 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지적 순례는 계속 됐다. 어린 시절 근본주의적 전통에서, 신보수주의로, 다시 자유주의로 선회했다. 나는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읽고 비로소 현실적인 평화주의에 도달했다. 현실적 평화주의는 인간 본성에 대한 피상적 낙관주의라는 허상과 그릇된 이상주의의 함정을 피해 가는 방법이었다. 평화주의가 어떤 상황에서나 옳은 것은 아니다.
 
4. 보스턴대학
  나는 보스턴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브라이트먼 박사와 함께 한 헤겔 공부는 논리적인 일관성을 추구하는 철학적 방법론을 가르쳐줬다. 1954년 무렵 적극적인 사회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적 흐름을 형식적으로나마 거의 섭렵했다. 그리고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권리를 위해 당당히 일어서서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불의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절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에 내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됐다.

5. 내 아내 코레타
  뉴잉글랜드 음악학교에 다니던 친구 메리 포웰의 소개로 코레타를 알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나는 코레타와 이야기를 나눈지 한 시간만에 결혼을 결심했고, 만난지 1년만인 1954년에 결혼했다.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우리는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앨라배마 주 마리온에서 태어난 코레타는 메조소프라노 성악가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결혼한 후 온갖 역경 속에서 헌신적인 태도로 내게 위안을 줬다. 어려웠던 시기에 희망의 등불을 놓지 않았던 아내 덕에 나는 고난과 긴장을 이겨낼 수 있었다.
 
6. 덱스터 애브뉴 침례교회
  21년 동안의 학교생활이 끝난 후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며 일자리를 구했다. 교수직이나 여러 행정직을 제안해 왔는데, 그 가운데 덱스터 애브뉴 침례교회에서 설교를 제안해 와 1954년 1월, 몽고메리의 덱스터 애브뉴 침례교회로 갔다. 그곳의 담임 목사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고 흑백분리가 상존하는 남부지역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까 고민했다. 나는 어려움과 희생이 불가피하더라도 고향인 남부지역에서 몇 년간은 봉직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덱스터 애브뉴 침례교회는 학위 논문을 쓰는 동안 전임 목사직을 담당하지 않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줬다. 논문집필과 교회직무로 아주 바쁜 날들을 보내면서도 나는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교회신도 전원에게 선거권 등록과 NAA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가입을 권유하면서 교회 내에 '정치사회활동위원회'를 조직했다. 또, 흑인과 백인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앨라배마 인간관계평의회'에서도 활동했다. 몽고메리에 정착한지 1년만에 첫 딸 욜라를 얻고 곧 버스보이콧 운동을 시작했다.
 
7. 몽고메리 운동
  1955년 12월 1일 버스를 타고 가던 로사 파크스 부인은 백인 남자에게 자리를 내놓으라는 운전수의 요구를 침묵으로 거절하고 체포됐다. NAACP 몽고메리 지부 대표였던 닉슨, 몽고메리 퍼스트 침례교회의 목사였던 랄프 애버니시 목사 등과 함께 버스 보이콧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몽고메리 주는 특히 흑백차별이 심한 곳이었다. 하지만 보이콧이라는 방법이 비윤리적이며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이때 내게 확신을 준 것은 소로우의 '시민불복종론'이었다. 과연 보이콧 운동이 성공할 것인지 마음을 졸였다. 마침내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던 날, 시내를 돌며 버스를 살펴봤다. 버스 안에 흑인은 한 명도 없었다. 60% 협력을 바랐는데 100% 였다. 드디어 파크스 부인의 공판일, 판결은 뜻밖에도 유죄였다. 이것은 흑인들의 적극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촉매제로, 또 흑백분리법률의 합당성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됐다. 대책기구로 곧 '몽고메리 진보연합(MIA)'이 결성됐고, 나는 의장으로 선출됐다. 진보연합은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항의운동을 계속 한다는 것, 그 요구사항은 결의문 형식으로 작성해 대중집회에서 승인을 얻어야 할 것 등을 결의했다. 그 날 대중 집회에서 나는 파크스 부인 사건부터 흑인들이 겪어왔던 학대와 모욕의 역사를 이야기해 나갔다. 아무런 준비 없는 연설이었지만 청중은 깊은 감명을 받은 듯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 자리에서 버스 운전수들의 정중한 대우가 보장될 것 등 모두 세 가지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8. 필사적인 저항
  첫 대중집회의 들뜬 분위기에서 벗어나 나는 우리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자금을 담당할 위원회를 비롯해 여러 조직을 만들었다. 우리보다 앞서 버스 보이콧 운동을 벌였던 루이지애나 주 배턴 루쥐 시의 선례를 따라 버스를 대체할 카풀 운동을 벌였다. 자원봉사자는 금새 300명을 넘어섰다. 버스 보이콧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백인들도 늘었다. 몽고메리 운동은 간디의 비폭력 저항과 맥을 같이 했다. 흑인들은 위기상황에서도 비폭력을 견지했다. 버스 보이콧 운동이 장기화되자 시에서는 MIA에 협상을 제안해 왔다. 1차 협상은 결렬됐다. 협상과정과 결과를 지켜보면서 나는 강력한 저항 없이 사람들은 순순히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함께 흑백분리제도의 목적이 흑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차 협상에서 백인 대표들은 내가 문제해결의 주요 장애물이라며 분열책동을 시작했다. 협상이 타결됐다는 거짓 신문보도를 내보내기도 하고, 시장이 TV에 직접 나와 보이콧 운동을 비난하고, 교통법규 위반혐의로 카풀 승용차를 잡기도 했다. 그러던 1월 중순 어느 날, 카풀 정차 장소에 들르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경찰차가 따라 붙더니 속도 위반이라면서 나를 체포했다. 경관에 이끌려 간 곳은 몽고메리 시립 교도소였다. 사람들이 교도소로 몰려오자 교도관은 나를 보석으로 풀어줬다. 그날 이후 나는 자유에 대한 투쟁에 더 헌신적으로 매달렸고, 그럴수록 협박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가족을 위협하는 전화를 받고 나는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때, 머릿속에서 울리는 조용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듣고 나는 다시 용기와 확신을 얻고 의연하게 일에 매달렸다. 그러자 죽음이라는 문제와 정면으로 맞붙어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9. 몽고메리의 승리
  폭력으로도 우리의 운동을 막을 수 없었던 반대세력은 대량 체포계획을 세웠다. 우리의 행동이 보이콧 금지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교도소는 축제분위기였다.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나는 내 죄가 자랑스러웠고 항의운동은 계속됐다. 하지만 아직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시 당국은 카풀을 방해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바로 재판 당일 미연방최고법원이 버스 내 흑백분리에 대한 위헌결정을 지지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날 카풀제도 금지결정이 내려졌다. 앞으로의 운동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항의운동은 중지하되 강제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버스 이용을 자제하기로 했다. 그 날 밤, KKK단이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흑인들의 대처는 전과 달랐다. 집의 불을 끄고 죽은 듯 있던 흑인들은 KKK단원들을 오히려 구경 삼아 지켜봤다. 드디어 흑백 통합버스 운행이 결정됐다. 나는 새로운 제도 앞에서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상호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고 연설했다. 몽고메리 흑인 운동은 여러 측면에서 흑백차별 철폐운동의 전환점이 됐다. 흑백 차별에 대한 저항이 전면적으로 일어났다는 점, 비폭력저항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사용했다는 점등이다. 무엇보다 흑인들 스스로의 변화가 값졌다.
 
10. 확산되는 투쟁
  몽고메리 운동은 승리했지만 시련은 계속됐다. 1957년 1월 흑인지도자회의에 참가하기 직전 친구인 애버니시의 집과 퍼스트 침례교회가 폭파됐다. 여러 건의 폭파사건이 일어나자 몽고메리 시 위원회는 버스의 운행을 중지시켰다. 흑인사회는 위축됐고, 다시 긴 투쟁이 시작됐다. 나는 혼란을 느꼈지만 여러 사람의 격려로 곧 평온을 되찾았다. 폭파사건의 용의자들이 검거됐지만 법원은 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질서 교란행위는 오래 가지 않았고, 흑백차별 폐지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1957년 2월 「타임」지는 몽고메리 운동을 커버 스토리로 간행했다. 점차 항의운동에 대한 일반인의 감정과 갈등이 완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몽고메리의 인종문제는 전에 비해 크게 개선됐지만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957년 5월 시민권 지도자들은 최고법원의 흑백분리 금지결정 3주년을 기념해 워싱턴 DC를 최종 목적지로 한 순례기도회를 시작했다. 또, 여름에는 SCLC(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남부기독교지도자협의회)가 시민권 쟁취를 위한 십자군운동을 계획했다. 모두 흑인의 투표권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11. 새로운 국가의 탄생
  1957년 3월 가나가 독립했다. 새로운 국가의 탄생, 나는 그것을 직접 보고 싶었는데, 마침 그곳에 가게 됐다. 그곳의 후미진 골목에까지 울려 퍼지는 자유의 외침에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애굽의 지배에서 탈출해 홍해를 건넌 셈이었다. 이제 그들 앞에는 황무지가 나타날 테지만 "편안한 예속보다 위험한 자치를 원한" 그들의 용기와 신념으로 무사히 건너게 되리라 생각했다.
 
12. 죽음의 위협
  1958년 어느 토요일, 몽고메리 운동의 자전적 기록인 『자유를 향한 발걸음(Stride Toward Freedom)』에 사인을 하고 있다가 한 흑인여성의 칼에 찔렸다. 재채기를 하지 않은 덕분에 죽지는 않았지만 날카로운 칼끝이 대동맥에까지 닿은 큰 부상이었다. 하지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유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이상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13. 비폭력운동의 산실, 인도 순례
  인도여행은 내 오랜 꿈이었다. 부상에서 회복된 뒤 1959년 2월 아내와 친구와 함께 인도여행에 나섰다. 그곳에서의 환대는 대단했다. 인도는 엄청난 인구와 함께 많은 문제를 가진 나라였다. 당시 인도에서는 미국인들은 거의 알지 못하는 대규모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부단(Bhoodan)이라는 토지개혁운동이었다. 그것은 마을 경제의 자급자족을 목표로 대규모 농지 소유자들로 하여금 마을 단위의 공동 협동조합에 농지 소유권을 넘기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조직화와 추진력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운동을 벌여나가는 '부단주의자'들을 보며 정신적 역량을 잃지 않고 우리 영혼까지 구원할 수 있도록 인도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의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철폐 과정은 미국의 흑백차별 정책이 철폐돼 가는 과정에 비교해 볼 수 있다. 간디는 불가촉천민에 대한 착취에 대해 긴 단식으로 항의했다. 죽음에 이르기 직전 결국 브라만들은 불가촉천민에게 힌두교 사원의 문을 열었다. 인도의 네루 수상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저질러온 불가촉천민에 대한 불평등을 시인했다. 하지만 미국의 고위 공직자 가운데는 아직도 흑백차별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거부하고 남부 출신 공직자 가운데는 흑백분리제도를 유지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발언하는 이들이 있다. 인도여행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비폭력적인 수단으로 자유를 얻어야겠다고 결심하는 등 비폭력주의에 대한 인식과 열정이 보다 깊어졌다.
 
14. 연좌운동
  몽고메리에 거주한 지 5년만에 나는 애틀란타로 이주하기로 했다. 그것은 흑백차별제도에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결단이었다. 그 즈음 나 자신에 대해 많이 반성하고 있었다. 과중한 업무에 치어 축적된 지식과 사고를 발산하는데 집중됐을 뿐 새로운 지식과 사고를 흡수하는 데는 무심했기 때문이다. 1960년 남부학생들이 연좌시위운동을 벌였다. 흑인들은 식당의 카운터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도록 규정한 런치 카운터 문제를 들어 시위를 벌이며 시작해 법정소송, 버스 보이콧, 불매운동, 대중행진과 시위 등 당당한 자세로 비폭력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나는 이 투쟁에 참여해 재판을 받게 됐으나 배심원과 판사, 검사가 모두 백인인 상황에서 배심원의 무죄 평결을 이끌어냈다. 윌리엄 밍 변호사와 허버트 델라니 변호사의 도움이었다.
 
15. 애틀랜타에서의 체포와 대통령 선거
  내가 존 케네디를 만난 것은 그가 상원의원으로 대통령 후보로 나선 때였다. 그는 흑인의 투표권 문제를 근본적인 문제로 생각했다. 당시 케네디는 흑백차별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었지만 문제를 제대로 알고 있진 못했다. 그러나 그가 당선되면 시민권에 관한 한 옳은 길을 걸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나는 그를 지지했다. 1960년 10월, 나는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체포됐다. 런치 카운터 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이 사유였다. 하지만 여론이 나빠지자 고소를 제기했던 상인들은 고소를 취하했고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석방됐다. 하지만 운전면허증을 애틀랜타 것으로 변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됐다. 6개월 강제 노역형을 받고 나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갔다. 케네디는 자신의 동생 로버트와 함께 석방을 위해 애써줬다. 대통령 선거 바로 2주전이었다. 닉슨이나 케네디나 두 인물에 대한 내 평가는 별다르지 않았지만 케네디가 내게 보여준 진심 어린 관심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했다.
 
16. 올버니 운동
  1961년 케네디는 행정부는 자신을 지지한 흑인들의 시민권 주장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흑인들은 대량 투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했다. 특히 학교, 투표권, 공원 및 도서관, 식당, 버스 등 곳곳에서 흑백차별이 벌어지던 조지아 주 올버니에서는 그 투쟁이 극적으로 표면화됐다. 1961년 12월 11명의 '자유승차' 운동가들이 올버니에 도착했다. 그들이 불붙인 올버니 투쟁은 비폭력 투쟁의 다양한 방법을 실험하는 장과 다를 바 없었다. 시 당국은 완고한 태도를 유지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투옥했고 사람들은 수감동료로 기꺼이 단결했다. 나 역시 수감됐다. 1962년 SCLC는 올버니로 경험이 많은 지원인력을 파견했다. 나는 곧 교도소에서 풀려났지만 달갑지 않았다. 7월, 경찰이 평화시위대에 폭력을 사용했다. 나는 어떤 순간에도 폭력으로 보복하지 말도록 신신당부했다. 올버니 흑인인구의 5%가 자발적으로 수감되고, 95%가 버스와 상점을 상대로 한 보이콧에 참여했다. 버스회사는 망하고, 상인들의 판매고는 점점 줄었다. 그런데 성과는 없었다. 우리가 벌인 운동이 흑백차별 전반에 대한 막연한 항의가 돼 버렸기에 구체적인 것을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투쟁이 끝난 직후에 있었던 시장 선거에서 온건파 후보가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다. 올버니 운동은 힘든 장기전이었지만 도덕적 명분을 얻음으로써 앞으로의 운동에 정신력을 제공했다.
 
17. 버밍햄 운동
  버밍햄은 미국 최고의 흑백차별 도시로 흑인 남성을 끌어다 거세를 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 버려두고 가는 야만적인 행위도 발생하는 곳이었다. 백인의 오랜 폭정에 위축된 흑인들은 희망을 잃어버렸다. 그런 버밍햄에서 백인지상주의의 권좌에 도전하는 일이 발생했다. 1962년 5월, SCLC 집행부 회의에서 셔틀즈워드 목사와 앨라배마 기독교 인권운동을 'C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지원하기로 했다. 올버니 운동의 교훈에 따라 상거래상의 흑백차별 문제를 집중 거론하기로 했다. 1963년 4월, 앨버트 바우트웰의 시장 당선이 확정된 후 우리는 연좌시위를 시작했고, 사흘만에 35명이 체포됐다. 시청 행진과 불매운동은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교도소는 흑인들로 채워져 갔다. 시 당국은 법률을 이용해 다른 돌파구를 찾고자 과격하게 대응하지는 않았다. 지도부는 나만은 투옥되지 말아야 한다며 시위에서 빠지라고 지시했지만 거절했다. 네 번째 아이를 출산하고 집에 있던 아내는 케네디에게 수감상황을 알렸고 상황은 한결 호전됐다. 거기 있는 동안 갇힌 버밍햄의 시민들을 석방시킬 수 있는 보석금을 얼마든지 모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시 햇빛을 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18. 버밍햄 교도소에서 온 편지
  교도소에 갇혀 있는 동안 우리 나라 주요 교파의 성직자들이 우리 운동을 비판한 광고를 게재한 것을 보았다. 나는 당장 길고 긴 반박문을 썼다. 그들이 버밍햄에서 일어난 시위를 비난하고 있지만 그들은 시위를 야기한 조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먼저 지적했다. 시장이 바뀌었으니 좀 기다려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시위보다 협상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자유란 압제자가 자발적으로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줬다. 법을 어기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우리가 '불멸의 자연법에 근거하지 않는 인간의 법'을 어기고 있을 뿐 정당한 도덕법이나 신의 법을 준수하고 있음을 환기시켰다. 현상유지를 원하는 온건한 백인들이 지금 운동의 더 큰 장애물임을 이야기하면서 자유쟁취투쟁에 적절한 시점이 있다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버밍햄에서의 우리 행동이 극단적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누구나 품을 수 있는 불만을 비폭력적 직접 행동으로 발산하는 것이 극단적인 방법이냐고 되물었다. 백인교회와 그 지도자들이 미칠 수 있는 긍정적인 영향을 외면하는 많은 백인 성직자들에 대한 실망을 털어놓고 초기 기독교의 희생정신을 강조했다. 나는 그들과 동료 성직자, 기독도교 형제로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19. 드디어 자유다
  랄프 애버니 씨와 나는 8일만에 보석으로 석방됐다. 우리는 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의 우리 운동의 주축이 될 수 있도록 순회강연을 시작했다. 청소년들은 많은 호응을 보내줬으나 예상했던 대로 청소년의 투쟁참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 SCLC의 활동가 제임스 베빌의 조직한 시위로 2,500여 명의 청소년이 교도소에 수감됐다. 교도소가 시위자로 가득차고 전국에서 따가운 비난이 이어지자 시 당국은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하지만 시위자들은 비폭력을 고수했다. 나는 그때 비폭력주의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느꼈다. 마침내 연방정부는 시민권 부국장인 버크 마샬 등을 파견해 협상을 유도했다. 협약 조인 후 90일 내에 런치 카운터, 화장실, 탈의실, 주점에서의 흑백차별을 철폐한다는 내용 등 모두 4개항의 협약이 이뤄졌다. 하지만 아직 역경은 끝나지 않았다. 흑인운동 지도자에 대한 폭파사건과 폭행사건이 이어졌다. 교육청은 시위 참여학생 1천 여 명에게 정학 및 퇴학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우리는 시위 대신 법정 소송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터틀 판사는 학생들이 헌법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적합한 행동을 취했음을 인정했다. 버밍햄 협약은 정의와 자유, 그리고 인간적 존엄을 위한 기나긴 투쟁의 절정에서 얻어진 결과였다.
 
20. 워싱턴 행진
  1963년 여름, 흑인운동의 전기가 되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시작은 고참 흑인 지도자 A. 필립 랜돌프의 워싱턴 행진 제안이었다. 워싱턴 행진의 정신은 자유주의적 백인과 대규모 종교조직의 지도자들에게까지 확산됐다. 1963년 8월 28일, 백인과 흑인, 노인과 어린이가 뒤섞인 군중은 가장 강력한 무기가 사랑이라고 믿는 전투부대였다. 나는 8월 28일 연단에 서서 연설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곧 애써 준비한 원고 대신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란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미국이 지금 당장 인종차별을 중지해야 하며, 사태의 긴급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흑인들의 시민권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미국은 평화로울 수 없다. 그리고 정당한 자유를 찾으려는 우리들의 옳은 의지를 증오와 원한으로 채워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피부색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 않고 흑인 어린이와 백인 어린이가 나란히 손을 마주 잡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이다. 내 꿈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그래서 전국의 산허리에 자유의 노래가 울리게 될 것이다." 워싱턴 행진은 미국 백인들의 양심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행진 참여자들이 시종일관 보여준 당당하고 조직적인 모습, 단정한 복장, 친절한 태도, 흑인 지도자들의 사려 깊은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강한 확신과 용기를 주는 역동적인 경험이었다.
 
21. 환상의 죽음
  우여곡절 끝에 버밍햄 협약이 맺어졌지만 KKK단을 위시한 일부 백인 세력은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나는 백악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대통령은 나를 비롯한 버밍햄 운동 지도자들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나는 대통령이 특정한 조치를 취하길 기다렸지만 소용없었다. TV에서 살해된 아이들을 위해 눈물 흘리던 백인 공직자들이 장례식장에는 대리인조차 보내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흑인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지 여부를 가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워싱턴 행진을 기억하며 다른 때보다 더 절실하게 비폭력주의를 고수하기로 했다. 그때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했다. 나는 그 원인을 도덕적 무관심으로 파악했다. 케네디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중병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슬픔이었다.
 
22. 세인트 오거스틴
  1963년과 64년은 흑인의 시민권 운동에 큰 계기가 됐다. SCLC의 활동 프로그램의 근간은 여전히 비폭력이었다. 'KKK단'과 '존 버치회'의 거점인 아름다운 도시 플로리다 주의 세인트 오거스틴은 SCLC에 도움을 요청했다. KKK단이 흑인을 납치해 무자비하게 구타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세인트 오거스틴 지부는 흑인 백인 공동위원회 구성 등 네 가지를 운동 목표로 삼았다. 경찰들이 묵인하거나 직접 자행하는 폭력에 세인트 오거스틴의 흑인들은 정면으로 대결했다. 마침내 주지사는 흑백 공동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고, 우리가 그곳을 떠날 무렵 린든 존슨 대통령은 시민권 법령이 국법으로 제정됐다. 시위는 법제화와 법 집행과정을 재촉했다. 또한 그 과정은 흑인들에게 인간적 존엄성을 강화시키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시민권 법령은 선구적인 몇몇 사람들의 공적이 아니다. 대중집회와 행진운동에서 싹 튼 것이다. 이제 남부와 북부 흑인들의 대규모 투표권 행사를 통해 자유쟁취투쟁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 올려야 했다.
 
23. 미시시피의 도전
  1964년, 시민권 법령이 통과됐지만 현실 정치는 비관적이었다. 공화당은 인종차별주의, 극단주의를 지향했고, 국수주의와 고립주의, 호전적 태도를 가진 골드워터를 공식적으로 지지했다. 흑인들에게는 다시 시련의 시기가 다가오는 듯 했다. 미시시피 지역은 경제적 착취는 물론 물리적 폭력이 지속되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주 전역에 걸친 조직화 사업을 계획했다. 내가 연설하기로 한 침례교회에는 종교와 나이를 넘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나는 거기서 희망을 봤다. 미시시피의 흑인들은 정치구조의 개혁과 경찰구조의 개혁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1964년 자유민주당을 창립했다. 선거인 등록 운동을 하고 있는 동안 활동가들에게는 야만적이고 잔혹한 탄압이 이어졌다. 자유민주당은 민주당 전당대회에 대표를 보내 대의원 의석 할당을 요구할 계획이었다. 민주당 전당대회의 자격심사에서 흑인들은 영혼과 가슴에 와 닿는 호소를 했고, 그 결과 충성선서를 조건으로 두 석의 대의원을 인정하자는 타협안이 나왔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공화당 패배는 극우세력에게 큰 타격을 줬다. 미국 정치는 새로운 개혁이 필요했다.
 
24. 노벨평화상
  시민권 활동으로 피곤해진 나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병원에서 휴식을 취했다. 신체정밀검사를 받은 다음날 나는 침대에서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노르웨이 의회가 나를 1964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했다는 소식이었다. 내게 주어진 노벨 평화상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운동의 지속을 위해 묵묵히 싸워온 사람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상이라고 생각했다. 노벨 평화상 수상은 시민권 투쟁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 전 세계 여론이 우리편이 된 것이다. 또 인종차별이나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단지 우리 나라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인도, 멕시코, 콩고 등이 직면한 문제이기도 했다. 노벨 평화상 수상은 우리 운동 방식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상을 받으며 사람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오슬로에서 돌아온 후 여러 차례의 인터뷰에서 인류가 직면한 인종차별, 빈곤, 전쟁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며, 그 효과적 무기로서 비폭력 방식을 심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상을 받고 있던 그 순간, 미국 법원은 미시시피의 흑인 활동가 살해용의자 19명에 대한 기소가 각하됐다. 우리는 미시시피 주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미시시피 생산품 불매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25. 말콤 X
  말콤 엑스는 논리 정연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지닌 정치적, 철학적 견해의 상당 부분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가 주장하는 무장과 폭력은 결국 재앙 외에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폭력은 무저항과 다르다. 말콤 엑스는 어쩌면 미국 흑인들의 비참한 생활에 스며든 증오와 폭력이 만들어낸 절망감의 희생양이었다. 그는 비폭력운동에 관심을 가졌지만 폭력주의를 버릴 수도, 정치적 관심을 발현할 수도 없었다. 현재의 사회조건이 자신의 할머니의 강간과 아버지의 살해를 용인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사회질서를 받아들이거나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잉태한 폭력에 희생되고 말았다. 분명 그가 견지한 블랙 내셔널리즘은 흑인들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은 백인의 패권적 지배를 흑인의 것으로 대체하는 것 이상은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인류애가 실현되는 사회, 도덕적 균형을 잃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26. 셀머 투쟁
  1964년 2월 스칸디나비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존슨 대통령을 만났다. 나는 대통령에게 투표권 법안의 통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혀 손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곧 셀머에서 중요한 활동을 진행했다. 셀머 당국은 흑인들의 투표권 운동을 막기 위해 게슈타포식 통제기법 등을 이용했다. 하지만 우리는 1965년 1월, 브라운 채플 A. M. E. 교회에서 법원까지 거리행진을 시작했다. 거기서 모두 3천 여 명이 체포됐다. 2월, 교도소를 나온 후 나는 곧 험프리 부통령과 카젠바흐 법무장관을 만났다. 그들에게 존슨 대통령이 투표의 권리나 기회에 있어 남아 있는 모든 장애물을 일소하자고 했던 연두교서를 환기시켰다. 여러 가지 오해가 있었지만 나는 셀머에서 몽고메리까지의 비폭력 행진을 계획했다. 월러스 주지사는 행진금지령을 내렸지만 잔인한 탄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잔인한 탄압이 자행됐고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에 자책감을 느꼈다. 몽고메리 행진에 대해 판사가 행진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실망스러웠지만 우리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런데 3월 11일 셀머에서 제임스 립 목사가 살해당했다. 우리는 평화행진에 대해 법적 승인을 받고 전국 각지 사람들의 참여를 촉구하며 행진에 나섰다. 이 행진은 아주 평화적으로 이뤄졌으며 전 기독교계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1965년 3월 15일, 존슨 대통령은 연방정부의 법률로 흑인들의 시민권을 온전히 보장해야 한다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딛고, 드디어 투표권 법령이 탄생했다.
 
27. 와츠
  로스엔젤레스 와츠에서 일어난 폭동소식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폭동에 참여한 이유는 일자리와 인간 존엄을 되찾는데 있었다고 말했다. 폭동을 통해 그들이 오랫동안 겪어온 고통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존재를 알렸다. 적의를 가진 흑인들도 있었고 분위기가 파괴적 폭력적이었지만 곧 우리가 역설하는 비폭력주의에 열렬한 호응을 보냈다. 폭력은 반동적 백인들의 저항을 강화하고, 자유주의적 백인들의 죄책감을 완화시킬 뿐이었다. 하지만 로스엔젤레스는 당국자들의 완고한 태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사회적 격변기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비폭력적 분위기를 지속시키려고 노력했다. 대통령에게 와츠 문제와 관련, 로스엔젤레스의 빈곤대책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구했다. 와츠의 각계 각층의 갈등을 막기 위해 흑인 지도자들과 주민들의 정치력이 필요했다.
 
28. 시카고 운동
  1965년 초여름, 시카고 흑인 지도자들로부터 흑백차별이 없는 질 높은 교육을 쟁취하기 위한 자신들의 투쟁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시카고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의 벽을 넘자면 백인사회와 흑인사회 모두가 대규모 비폭력 운동에 나설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우리는 제임스 베벨 목사가 이끄는 SCLC 선발대를 보내 우리 사회에서 일소돼야 할 폐해들이 어떤 것인지 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 1966년 나는 시카고에 머물면서 활동했다. 빈민지역에 들어가 흑인들이 겪는 생활조건을 직접 경험하기로 했다.
  내가 머문 론데일 빈민가는 풍요의 바다에 떠있는 궁핍의 섬이었다. 북부에서는 비폭력운동이 불가능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1966년 7월, 폭동이 일어났다. 실망이 컸다. 하지만 나는 계속 비폭력주의를 견지하겠다고 다짐했다. 수많은 행진자들은 주거의 자유를 위한 비폭력 시위를 시작했다. 우리의 요구는 빈민지역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또, 흑인들의 고용을 늘리기 위해 흑인을 고용하지 않는 업체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였다. 부당하게 매겨진 임대료 지불 거부 운동도 벌였다. 시카고 당국은 협상 안을 내놓았지만 주거의 자유는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시카고 같은 북부 도시지역은 남부 농촌지역에 비해 변화에 대한 저항이 훨씬 심했다. 하지만 시카고 지역의 양심적 세력과의 광범한 연대는 분명 수확이었다.
 
29. 블랙 파워
  1966년 6월 6일, '미시시피를 관통하는 자유행진'을 이끌던 제임스 메데레스가 하루만에 등 뒤에 관통상을 입었다. 흑인 지도자 몇 명과 그를 병 문안 갔다가 스토클리 카미이클과 만났다. 우리는 추악한 인종차별주의를 고발하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일깨우자고 다짐했다. 다시 미시시피를 관통하는 자유행진을 시작했는데, 몇몇 형제들의 입에서 폭력대결을 지지하는 발언이 나왔다. 나는 인종적 정의를 위해 비폭력주의와 흑인과 백인의 동시참여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연합기자회견을 통해 그런 입장을 공식화했다. 행진을 진행하면서도 논쟁과 토론은 계속됐다. 스토클리는 미시시피의 인종차별제도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역설하며 '블랙 파워'를 주창했다. 나는 '블랙 내셔널리즘'으로서가 아니라 정당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지 경제적 힘을 결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블랙 파워'를 지지했다.
  언론은 이런 논쟁을 시민권 운동진영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분열로 보도했다. 이제 중요한 시사용어가 된 '블랙 파워'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첫째, 블랙 파워는 절망의 표현이다. 둘째, 흑인들에게 정의의 실현을 위해 힘을 결집할 것을 호소한다. 셋째, 인간 존엄에 대한 심리적인 갈망이다. 수세기 동안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하는 사실을 주입 받았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엄성을 인식하게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블랙 파워'는 우리 운동에 긍정적이기도, 부정적이기도 했다.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비폭력은 힘이며, 또한 힘을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이다.
 
30. 베트남 전쟁
  인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폭력과 전쟁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베트남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공개토론을 회피하는 정부를 대상으로 협상을 통한 휴전으로 살상과 파괴를 중지시켜야 한다고 공식적인 발언을 했다. 사람들은 시민권 문제와 평화 문제는 어울릴 수 없다며 내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발언하는 것에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확고했다. 베트남 전쟁은 전 세계의 운명을 난도질하고, 제네바 협정을 위반했다. 유엔에 심한 타격을 주었으면 대륙간, 인종간 증오심을 악화시켰다. 군사 수요의 끝없는 증대는 서민들의 생존과 관련된 요구를 억압했다. 나는 악몽과 같은 전쟁을 끝내고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고 믿는다.
 
31. 빈민운동
  1967년 11월, SCLC는 1968년 봄부터 빈민들의 워싱턴 D.C.행진을 주도하기로 했다. 빈민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최소한의 직업과 소득을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2, 3주 동안의 행진으로 의회가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교육적 효과는 크리라 예상했다. 멤피스 청소원들의 파업 현장으로 달려가 몇 번의 연설을 했다. 나는 그들의 파업에서 모든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가치 있는 것을 얻으려면 희생이 필요하고, 압제자들이 결코 자발적으로 자유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32. 못 다 이룬 꿈
  나는 죽음이 닥쳐올 순간을 늘 생각한다. 죽음이 음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내가 진정으로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자문하곤 한다. 나는 그날이 오면 내가 자신의 인생을 남을 돕는데 바치려 노력했다는 말을,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전쟁문제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가지려 노력했다는 말을,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려고 했다는 말을,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에게 봉사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다.
 
 
▣ 저 자 : 클레이본 카슨
클레이본 카슨은 스탠포드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미국 흑인 시민권 운동의 전문가다. 『투쟁 속에서 - SNCC와 60년대 흑인들의 각성』『말콤 엑스 - FBI 파일』 등을 발간했고, 최근작으로 킹 목사의 설교 모음집 『한밤중의 노크소리』가 있다. 그가 마틴 루터 킹을 본 것은 '고용과 자유쟁취를 위한 1963년 워싱턴 행진'의 연사로 연단에 섰을 때였다. 처음 시민운동 시위에 뛰어든 열아홉의 대학생은 20년 후 스탠포드대학의 역사학 교수가 됐고, 킹 목사의 부인인 코레타 스콧 킹의 부탁으로 '킹 목사 문헌편집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됐다. 카슨은 킹 목사를 연사와 청중으로 먼발치에서 한번 봤을 뿐 한번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 킹 목사를 문헌편집을 하면서 점차 알아갔다. 카슨은 스스로 자신의 학문활동에 킹 목사 연구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고백한 것처럼 자전적 기록은 물론, 생전에 남긴 자투리 글, 기록된 발언, 녹취된 발언까지 모아 킹 자신의 입장에서 재구성했다. 스스로 쓴 것이 아닌 데도 '자서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노력에 따른 것이다.
       
나의 운명 나의 인생을 바꾸는 21일 프로젝트 김두현 2007.02.12
감성 바이러스를 퍼뜨려라 김두현 2007.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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